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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안나>의 ‘극중’ 스카이 아파트에는 모종의 다른 곳에서 온 도망자, 그리고 이 도망지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온 원주민이 등장한다. 보여주지만 그 무엇도 서사적으로 종결하지 않고, 그 뒤를 상상하게 하겠다는 <율리안나>의 포부는 ‘공간에 담긴 아픔’, ‘집을 잃은 도시빈민층의 삶’ 등을 다루려는 시도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시도한 형식적 급진성에도 불구 <율리안나>는 결국 그 현실의 공간과 현실의 사람을 타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자살 미수와 같은 ‘극적 사건’들 속에서 이 곳은 마치 극을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극의 공간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감독 자기 고유 영역과 작품의 공간, 혹은 관객의 공간에서는 극중 스카이 아파트 공간에 대한 어떠한 틈도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결국 <율리안나>의 극중 스카이 아파트는 스크린 속 전혀 다른 이질의 세계가 되어버린다(물론 <율리안나>의 작가 감독에게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닐 것이다).

<콘크리트의 불안>은 다르다. 먼저 작가로서의 감독을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다. 장윤미의 작가주의적 성향의 하나는 피사체를 타자화하지 않으려는 방향의 ─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타자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의 ─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스카이 아파트의 잔류하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장윤미에게 촬영 거부 의사를 밝혔고, 때문에 영화는 ‘물러선다’. 그런데 카메라-사람의 관계가 타자화가 이루어지기 쉬운 공간에서 <콘크리트의 불안>의 물러서기는 일회적 물러나기가 아닌 ‘전면적 후퇴’의 실천이 된다. 후퇴하면서도 영화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후퇴 가능한 공간을 작품 스스로가 포착하거나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의 불안>에는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끔씩 극소수의 사람들(배달부와 노인)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멀리서 혹은 흐리게만 다루어지며 서사 속으로 직접적으로 삽입되지 않는다. 이들은 근대적 지표로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고(나오지 않음으로써), 그렇기에 개인화되거나 서사화되지 않는다. 이는 동일한 공간이라도 그 의미망의 작동방식에 따라서 각 도시 행위자들에게는 다르게 여겨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아파트 외부자-여성-감독, 그리고 이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고 포커싱되는 실상 ‘유일한’ 생명체인 동물 ─ 개와 고양이, 비둘기와 참새 ─ 들에게 있어서 도시의 시공간적 의미는 한편으로 부동산 시장, 다른 한편 투쟁적 액티비즘으로 양분되던 근대적 메트로폴리스 시공간적 의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감독은 지금의 자신과 ‘어린 시절’의 자신을 분리하고, 다른 시간대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는 도시 공간의 심상적 지리가 (근대 도시에서는 주된 주체로 여겨지지 못한) 하위주체들의 의미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콘크리트의 불안>은 포스트메트로폴리스의 불균질한 도시 상상계를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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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빈

주로 서울과 경기도를 오간다.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서울역 일대를 필드로 경계와 재구성에 대한 학위논문을 썼고, 문제의식을 연장해 “공간주의"를 공동 개설했다. 공간문화, 도시사, 도시해킹, 수도권의 문제와 반려견과의 산책길에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