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장가연 (2021). 경성시대: 부재하는 역사 위 혼란의 교차로. 이승빈·김영대·신지연 (편), 〈잡종도시서울〉(pp. 65-98). 서울: 공간주의의 일부분입니다. 글의 전문 및 인용은 해당 서지정보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증할 수 있는 특권

게다가 경성을 완벽히 재현하라고 경성시대 유행에 요구할 수 없다. 어쩌면 요구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이는 강한 트라우마로 해리성 기억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과거를 기억하라는 요구와 비슷하다. 서울은 복잡한 과거사를 가진 도시이며, 그 과거 또한 멀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역사는 기록자가 필요하기에 자연발생하기보다는 후일 만들어진다. 유럽의 도시는 이런 역사적 합의를 수백 년에 거쳐서 쌓아왔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적인 것이 무엇인지, 혹은 로마적인 것이 무엇인지 공통의 기반을 만들었고 르네상스니 로코코니 하는 스타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를 그들의 기반이자 정체성으로 삼았다. 대중적으로 중세 건물이라고 인지되는, 사실은 기차와 전보가 있던 19세기 유럽 건축물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 유럽은 전세계를 상대로 은근한 사기를 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건축물 소개를 결코 보이는 대로 믿어선 안 된다. 과장을 조금 섞자면 그들은 <3세기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나 외세의 침략으로 전소해 7세기경 재건했다. 지속된 개보수로 현재에는 그중 공동묘지의 일부만 남아 있다. 14세기경 증개축을 거쳐서 현재의 규모를 이루었고 이후 방치되어 폐허로 남았다가 19세기경 복원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를 <3세기 준공> 이라고 표현한다. 조각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원전 5세기 경 아테네에서 제작되어 기원전 2세기 경 로마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로마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가 16세기경 스미스 경의 3차 발굴조사에서 산산조각난 상태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후 대대적인 복원 과정을 거쳐 (없는 부분은 상상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현재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를 <고대 그리스, 기원전 5세기>라고 표현한다. (물론 한국의 고건축도 결백하지는 않다.) 계속적으로 연구성과를 쌓아왔기에 게임 <어쌔신 크리드>처럼 과거의 일정 시공간을 시각적으로 매우 유사하게 재현해낸 매체가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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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 8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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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 88년 12월호

그에 비해 서울은 이런 합의를 거친 적이 없었다. 급속한 발전의 과정에서  단선적인 과거를 만들어 낼 여유가 없었다. 지난 100년간 서울은 미친듯이 달려왔다. 많은 삶을 짓밟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50년, 아니 30년만 과거로 회귀해도 서울에서 완전히 길을 잃을 것이다. 서울은 중세와 근대, 현대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섞여 있는 도시다. 소문과 사실을, 전통과 현대를 가르기 힘들다.

그럼에도 인간은 과거와의 연속성 속에서 살고 싶어한다. 자기 이전의 존재와의 연결에서 평안을 찾으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즐기고 싶어한다. 역덕의 방식이든, 판타지의 방식이든. 그 믿음이 참 신기하기도 하다. 근거와 정당화 없이 인간의 본성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믿고 있다. 나는 적잖은 시간을 오래전 죽은 사람들이 쓴 책, 즉 고전을 읽으면서 낭비했다. 그러면서 찾아낸 시대와 상관없이 반복되는 단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요즘 청년들은 예의가 없고 옛 선현들은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불안감이다. 현대의 요구를 투영할 수 있으면서 간단히 정당화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는 최고의 컨텐츠이다. 따라서 컨텐츠로서 근대 서울이 부상한 현상은 어쩌면 놀랍지 않을 일이다. 게다가 의무교육 기간에 근대 서울의 풍경 속 낭만을 제법 익히지 않았는가. 서울역의 가-베, 고종의 와플, 한국 문학의 얼굴인 백석과 임화까지.

그러므로 근대 없는 서울이 가치 측면에서도 나쁜지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재함이 곧 나쁨인가? 사실에서 가치는 도출되지 않는다. 서울의 과거를 모르는 게 아쉽고, 남겨야 할 유산인지 살펴볼 기회도 없이 스러져간 건축물이 안타깝다. 부재에서 시작한 왜곡이 퍼져나가는 것은 가치 측면에서 나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돈된 역사가 없다는 그 자체에 컴플렉스를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토록 혼란스러운 서울이 자연스러운 도시의 모습이며, 나는 유럽과 한국을 비교하며 깔끔한 역사라는 환상에 매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시대가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한 독립 이래 한국의 건축가들은 사라져가는 서울의 근대 유산을 걱정하고 있지만, 나는 88 올림픽 이전의 서울과 그때는 남아있었을 유산을 그리며 더 나았을 옛날을 부러워한다.

많은 경우 고증이란 역사적으로 옳다는 주장으로 이루어진 세계관이며, 그 세계의 논리성을 판단하는 잣대이다. 거대한 파충류처럼 그려지던 공룡이 이제는 털이 달리게 되었듯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다면 고증의 기준도 바뀐다. 특히 일상언어에서 고증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은 오래된 것을 증명하는 방식보다도 세계관의 논리성을 바라보고 있다. 판타지 세계관에서도 고증을 찾으니. 제련 기술이 없는 세계에 철제를 사용해야만 건설 가능한 대공간이 등장한다거나, 아직 직조기와 증기 기관이 없는 세계에 갑자기 기차가 나오면 몰입이 깨진다. 이런 세계관의 비논리성에서 나오는 당황스러움까지도 고증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나 싶다. 애초에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원본 따위는 없었다.

허구의 역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화된 믿음과 정당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믿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당화된 믿음이 원본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 믿음의 원인을 밝힐 수 있다면 그 논리적 오류를 찾아내기 용이하다. 정당화된 믿음은 앎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당화 과정을 알 수 없는 믿음은 비판하기가 어렵고 맹목적인 믿음으로 흐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정체화와 자본주의

그런 측면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역사-서사의 만남은 걱정할 만하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의 가치가 경제적인 가능성으로 환원된다. 잘 팔리는 매력적인 사연에는 산업적인 가치가 있다. 모두가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매력적인 부분만을 강조한다. 과거는 흥미를 끌 수 있는 방식으로 재조직된다. 팔리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정체성을 구축한다. 서울은 과거를 회고할 기회조차 없었으면서 매력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게 되었다. 매력을 얻기 위해서는 복잡한 속사정도 해쉬태그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의 가치를 구구절절 설명한다면 타인의 관심을 얻기 힘들고, 검색 채널이나 알고리즘에도 걸리지 않는다. 몇 개의 캐치한 키워드로 충분하다. 이제는 시간을 들여 읽어내야 하는 서사적 거창함보다는 바로 읽어낼 수 있는 콘셉트가 필요하다. 그렇게 대중매체, 뉴스, sns, 블로그를 가리지 않고 그 키워드에 대응하는 정보가 재생산된다.

앞서 논했듯 경성시대 인증샷 유행에 작용한 외력으로 컨텐츠와 관광을 들 수 있다. 특정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 드라마와 영화는 그것이 실재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한다. 해당 시기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배경으로 시대상을 전달해서 관객을 몰입하게 만들고, 설득시킬 수 있다.  기본적으로 드라마와 영화의 표현 방식은 카메라를 통한 재현이다. 실재했던 장소를 찾아가 촬영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한반도에 건물 단위의 근대 건축은 존재할지 몰라도 근대적 도시공간이 그대로 남아있는 구역은 잘 없다. 따라서 오로지 촬영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적 공간인 세트장을 배경으로 삼는다.

경성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다루는 컨텐츠를 제작할 때 국내 촬영장으로는 합천영상테마파크를, 국외로는 상해영시낙원을 많이 찾는다. 합천영상테마파크는 근대 배경의 촬영지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으로, 홈페이지에서 합천영상테마파크는 이렇게 소개된다.

“2004년도에 건립한 합천영상테마파크는 1920년대에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국내 최고의 특화된 시대물 오픈세트장으로 드라마 <각시탈>, <빛과 그림자>, <서울1945>, <에덴의 동쪽>, <경성스캔들>, <시카고타자기>, <비밀의숲>, <란제리소녀시대>, <화유기>, <미스터선샤인>, 영화 <태극기휘날리며>, <인천상륙작전>, <해어화>, <암살>, <써니>, <밀정>, <박열>, <택시운전사>, <대장김창수>, <판도라>, <강철비> 등 190편의 영화, 드라마 광고, 뮤직비디오 등 각종 영상작품이 촬영된 전국 최고의 촬영세트장입니다. 최근 영상테마파크 뒤편으로 150,000㎡ 규모의 전국 최고의 분재공원과 정원테마파크가 개장되었습니다. 메인건물인 청와대 촬영세트장과 함께 분재온실, 생태숲체험장, 목재 문화 체험장 등이 조성되어 있어 자연 속에서 어른, 아이 모두 즐길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세트시설과 편의시설로 우리군을 방문하는 분들을 즐겁게 해 드릴 것입니다.”

모든 씬의 촬영을 합천영상테마파크에서 진행하지는 않지만 시대적, 내용적으로 상이한 컨텐츠가 같은 도시 풍광을 공유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촬영한 작품 리스트를 보면 한국의 근대가 대충 합천영상테마파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테마파크에서 제공하는 배경 또한 상당히 잡종적이다. 한 시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건축적 모티브가 이상한 스케일과 도시조직으로 공존한다. 물론 임시구조물이나 블루스크린을 이용하여 배경에 변화를 주고, 후보정을 다르게 하기에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도로의 폭이나 원경의 오브제는 반복해서 보인다. 지역성은 당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합천영상테마파크는 디즈니랜드와 흡사하지만 역사됨을 주장하는 컨텐츠의 배경이다.

더 큰 규모의 촬영장소로는 상하이의 상해영시낙원이 있다. 상해영시낙원 또한 촬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으로 1930년대의 상하이의 난징로를 재현했다고 하며, 내부에는 전차도 다닌다. 그러나 이 곳에서 촬영된 작품은 상하이가 배경이 아닌 경우도 많다. 한국영화 <암살>과 <밀정>을 촬영했고,  양조위와 탕웨이가 출연한 <섹계>, 공리와 장국영이 출연한 <풍월> 이 같은 배경을 공유한다. 각각의 지역은 다른 방식으로 근대를 견뎌냈다. 지형도 기후도 다르며 근대 이전의 도시건축적 자산도 상이하다. 동아시아의 근대가 비슷한 배경으로 재현된다는 지점은 분명 염려스럽다.

나아가 근대를 향한 환상에 부흥하는 장소는 관광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생산될 자격을 얻는다. 현대에 관광지는 비일상적인 일부 구역에 준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시선이 향하는 빈도가 높은 장소가 곧 관광지이다. 관광의 시선은 도시 전반에 침투해 있다. 그 장소가 얄팍한 장식으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상관 없다. 몇 사람의 꼼꼼한 관찰자적 시선보다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다수의 시선이 경제적 가치가 크다. 인터넷상의 해시태그에 올라탈 수 있는 장소만이 부각되면서 시공간적인 연속체였던 도시공간은 각 키워드에 대응하는 점이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개중에서도 익선동의 사례가 안타깝다. 경성 컨셉의 의류 대여점이 위치하기도 한 익선동은 컨셉 사진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고, 어떤 블로그 광고에서는 경성 감성의 중심이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익선동에 덧씌워진 레트로 감성은 그 종류에서나 표현법에서나 상당히 혼란스럽다. 익선동에 들이선 도시형 한옥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소박한 주거지로 개발되었다. 한옥이 가지는 마당이나 트인 공간감을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 최대한 만들어내려 했고, 작은 규모이지만 대문과 외부공간을 갖춘 주거공간을 형성해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 익선동은 디벨로퍼의 손 아래에서 급격히 상업화되었다. 도시형 한옥은 입식의 상업공간에 적당한 구조가 아니다. 그렇게 작게마나 남아있던 외부공간은 면적을 제공하기 위해 실내가 되었다. 외부와 소통하는 보이드가 사라지고, 벽은 처마 끝으로 옮겨져 지붕의 감각 또한 약해진다. 그것을 싸구려 벽지로 마감하고 원목 가구를 넣어서 경성이라고 소비한다. 생각해보면 참 웃긴 것이다. 익선동에 과거가 투영되는 이유는 한옥이 있어서인데, 정작 주민들을 쫒아내고 한옥의 개성을 없애버리다니. 처음부터 실재의 한옥보다는 한옥의 시뮬라크르가 관심을 끌었을 뿐일까.

진짜 경성을 찾아줘

고증 무시에 분노를 표출하느라 정작 역사-서사와 관광이 환장의 하모니를 이루는 부분은 약해져버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역덕의 진심을 표출하자면 나는 단순해지는 재현이 미적 측면에서 안타깝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건축, 가구, 의복 모두 한 시대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물체들이며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이다. 겉보기에 비슷하게 생겼더라도 디테일을 따져보면 전혀 다르다. 특히 건축물은 한 사람의 의지대로 만들어내기 힘든 만큼 사회상을 다면적으로 반영한다.

도시공간의 생산은 그 시대의 생산 체계를 따른다. 한국에 일명 유럽식 건축이 유입된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먼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설계도면이나 건축가는 상대적으로 쉽게 수입할 수 있어도, 재료와 기술자까지를 전부 데려오기는 쉽지 않다. 건설 과정에서 현지와 조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한국의 유럽식 건축물은 대다수 국산 재료와 한국의 인력을 가지고 지어낸 결과물이다. 또한 유럽에서 건축가나 건축 도면이 온 경우도 있으나 미국이나 일본을 거쳐 건설된 경우가 다반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미국과 일본 모두 신고전주의 건축의 발원지가 아니다. 일본이 독일 등지에서 받아들인 신고전주의 언어를 피식민지인 한반도에 가져다 심은 것이 현재 우리가 보는 일제강점기의 서양풍 건축이다. 과거를 양식으로 정리하여 신고전주의의 이름으로 짬뽕한 결과를 다시 일본을 거쳐서 한국 땅에 가져다 심은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서유럽이 정리해낸 고전 건축에 썩 충실하지 않다. 그러니 한국의 근대 신고전주의 건축을 이것은 네오고딕이고, 저것은 네오르네상스라는 식의 서양 건축 언어로 정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의 유사-신고전주의 건축은 미묘하다. 아르누보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이나 특이한 곡선의 지붕, 외벽을 두른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의 감촉에 특유의 개성이 있다. 

앎은 실망이다. 그것은 고정된 무엇이라기보단 환상을 가졌다가 사실에 가까워지는 여정이자, 최선의 오해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첫인상만으로 상세한 사실을 알 수도 없다. 그러나 매력적인 이미지만을 승인하는 자본주의는 특정한 이미지를 고착시켜서 상업적 가치를 뽑아내려고 한다. 나는 가끔 이미지가 무섭다. 들리는 역사와 보이는 역사는 다르다. 찬찬히 시간을 들여서 들어야 알 수 있는 무엇과 한 장으로 압축되어 순간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무엇은 성격이 다르다. 

표피적인 이미지 소비는 관심을 끌기 좋을지 몰라도 한계가 있다. 경성시대가 나름대로 유행을 타고 양장이니 모던이니 하는 것들이 관심을 끌었지만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양장점이 부흥하지는 않았다. 중고 자개장이 인테리어 모티브가 되었지만 나전칠기로 관심이 이어지지는 않았고, 덕분에 고건축이 가진 환경친화적 속성이 다시 주목받지도 않았다. 과거가 대상인 다른 유행도 마찬가지다. 한복대여점이 당연한 관광코스가 되었지만 바느질 솜씨를 갖춘 장인이 운영하는 한복점은 문을 닫고 있다. 관심의 수혜자는 그 영감을 제공한 자가 아니다.

고향 집 근처에는 여관이 하나 있다. 어릴 적 가끔 해바라기 하는 멋쟁이 문인 할아버지들이 앉아 있는 곳이다. 여관이 마주한 골목 끝에는 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다방 마담이 최고가는 부자랬다. 이중섭이 커피 값 대신에 그림을 선물했다고, 그런 가쉽이 들리는 곳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도시의 중심이 이동했고 그 구역은 쇠퇴했다. 어느날 그 여관 앞에 여기가 김상옥 생가라는 판이 하나 생겼다. 상가는 하나 둘 비더니 이제는 남아있는 곳이 더 적어졌다. 그곳이 이제 근대문화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최근 듣게 되었다. 이제 도시재개발이 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곳에도 경성 컨셉 사진관이 들어설까? 



장가연

건축과 철학을 공부했다. 건축은 훌륭한 텍스트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 대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