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주의 구상

우리 모두는 각자가 위치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며 문화적이고 지리적인 위상에서 공간을 경험한다. 이 위상은 모든 이에게 온전히 동일할 수 없다. 동일한 위상의 3차원 좌표 위에서 복수의 주체가 완전히 겹쳐져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각기 다른 위상에서 펼쳐지는 경험은 공간을 장소로 체험하도록 만든다. 장소 체험을 통해 공간은 각기 다른 장소로 분할된다. 물론 공간은 원론적으로 장소 체험들의 중첩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한 각각의 장소체험들은 ─ 그것이 공간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자신의 장소 영토 바깥을 벗어나지 않는다/못한다. 설령 인접한 위상과 유사한 성격의 공간조차도 더 이상 같은 공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분명 이 글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지향은 <공간주의>의 출발점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적인 기본형 규정의 제시를 통해 사전적으로 우리를 규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를 보다 규정하는 것은 출발점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공간과 관련한 어떤 구체적 작업들을 하는지(쓰는지/모으는지)의 문제다. 이는 공간이 자연환경 내지는 최초 건조자에 의한 건조환경만을 구성 요인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옆/아래에서 관계를 맺는 다종다양한 스케일과 행위자들에 의해 구성-생산되는 것이라는 점과 상응한다. 공간이 끊임없이 (재)구성과 (재)생산되는 것이라면 공간을 다루는 플랫폼이 불변할 기본 규정과 상정하는 것은 결코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은 공간주의 구상의 1안이다. 그것은 우리가 조각모음의 목표를 일정수준 달성한다는 전제하에 <공간주의>의 구상 역시 2, 3, 4안…으로 계속 이어지며 새롭게 재구성되고, 재생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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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빈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서울역 일대를 필드로 경계와 재구성에 대한 학위논문을 썼고, 문제의식을 연장해 “공간주의"를 공동 개설했다. 공간문화, 도시사, 도시해킹, 수도권의 문제와 반려견과의 산책길에 관심을 갖고 있다. 주로 서울과 경기도를 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