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취향이랄게 딱히 없었다. 잘 만든 영화라면 다 좋았다. 못 만든 영화는 견디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이 좋다면 다 좋은가 보다 했다. 그러다가 ‘콜럼버스’를 보고 좋아서 주변에 권했는데, 다들 심드렁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좋아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이런 게 취향의 차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러나 단단한 균형은 변화와 배치된다. 케이시의 삼각형은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관성으로 그를 붙들어 맨다. 영화는 그 균형이 무너지고 해소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제 케이시는 콜럼버스를 떠나고 진이 남는다. 케이시는 떠나는 차 안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나는 이 장면이 슬프지 않았다, 이제 케이시가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일상을 균형 있게 건축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도 케이시의 엄마도 결국은 계속해서 살아갈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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